체르노빌 원전사고

체르노빌 원전사고

 

체르노빌 원전사고란?

1986년 4월 26일에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예프 주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원자력 사고이자 사고 레벨 7등급의 역대 최악의 원자력 사고입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경과

1986년 4월 26일 1시 24분경에 일어났습니다. 이날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는 부소장 겸 수석 엔지니어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지휘하에 특별한 실험이 기획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죠.

실험은 25일 낮시간대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안전장치를 정지시키고 저출력 상태로 변경했습니다. 이 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낮시간대 전력공급유지를 요구했기에 일시적으로 실험이 지연되어 26일 1시부터 14시까지로 변경되었는데, 그 때까지 계속 저출력 상태로 장시간 안전장치가 꺼진 상태에서 운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가 안전장치도 없는 구식 소련 원자력발전소가 원인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체르노빌 원자로에도 안전장치는 다 붙어 있었습니다. 당시 체르노빌 원자로에는 ECCS가 장치되어 있었는데, 실험 내에 이것을 꺼버리는 절차가 들어가 있었고, 실험을 지도하던 댜틀로프는 이 절차를 따라 ECCS를 모조리 해제하고 실험에 임했습니다. 어쨌든 다시 실험을 실시했을 때, 안전장치는 꺼진 상태였죠.

이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400배. 방사성 물질을 대량으로 생성하는 코발트 폭탄과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실제 핵무기보다 이런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방사선은 몰라도 방사성 물질은 더 많이 뿜어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음에도 체르노빌보다 더 빨리 복구된 사실을 기억한다면 알 수 있죠. 실제 핵무기가 떨어지면 처음 나오는 낙진만 물로 깨끗이 제거하면 방사능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체르노빌처럼 감속재가 아예 불타오르며 지속적으로 방사성 물질을 뿜어내면 피해가 커집니다.

폭발 후 최초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전력 케이블 대다수가 날아가 시설 곳곳이 마비되는 통제불능의 아비규환이 된 와중에도, 아나톨리 댜틀로프와 선임 연구원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는 발 빠르게 대처에 나섰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 폭발을 "수소 폭발로 인한 것이지 원자로 자체는 아직 멀쩡하다"고 판단하고 발전소 소장과 부소장에게도 그렇게 보고했다는 것이죠. 이로 인해 "원자로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한시바삐 화재를 진압하고 수동으로 노심에 제어봉을 삽입하고 냉각수를 공급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대처가 정해졌는데, 이미 4호 원자로 자체가 폭발해 노심의 잔해가 주변을 나뒹굴어 사방으로 치명적인 방사선이 유출되고 있을 때, 존재하지도 않는 원자로에 대한 급수 투입을 위해 인력을 투입시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들을 죽으라고 내보내는 짓이었습니다.

이 치명적인 오판으로, 아직 멀쩡했던 직원들 다수가 당하지 않아도 됐을 피폭을 당해 개죽음당하고 말았습니다. 후술하는 소방관들의 피폭도 이 오판으로 인한 결과였죠. 그나마 댜틀로프가 3호기 원자로 제어실로 뛰어들어가 정지를 요청한 것이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미드 체르노빌

신고를 받고 1차로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었고, 그 다음으로 급히 달려온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가 지휘하는 체르노빌 소방대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전력을 다해 진화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방사능 방호복도 없이 사투를 펼쳤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재난의 규모가 너무 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과 교대할 때까지 진화 작업에 전력을 다했고, 그 결과 오전 5시에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사고 직후 방사선에 피폭됐던 직원들과 1차로 파견된 소방대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쓰러져갔고, 결국 화재가 진압됐을 무렵 실험을 진행했던 새벽조 직원들 중 제 발로 서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재 진압에서 사용된 대량의 물이 4호기와 접촉하면서 증기로 변했는데, 이 증기가 내부 물질과 반응하여 가연성 물질을 만들어냈고 26일 21시 41분에 다시금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의 "원자로는 아직 무사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벗어나는 사태의 심각성이 계속 드러났고, 결국 체르노빌 사태 진압의 지휘권은 소련 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피해

 

인명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올레크 겐리흐처럼 폭발로 수증기를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올레크 겐리흐는 예외적인 경우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과정에서 방사선 피폭에 의해 56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투입된 인원 중에 이 중 2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쪽은 정말 방사선 때문에 사망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아서 비공식 집계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반핵단체에서 워낙 부풀린것도 있죠(예를 들면 자연사한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마저 죽었다고 부풀렸다.) 여기에는 당시 이 사고 잔해를 치우는 작업을 총지휘한 장군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당시 피폭 인원이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과학이론적으로는 있을지 없을지 모를 수준으로 저수준으로 피폭되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소련 정부는 제한된 사람들(주로 공산당원 위주)만 치료해주며 아전인수격으로 데이터를 해석했고, 반핵단체들은 자기주장관철을 위해 내용을 조작했기 때문입니다.

각 단체마다 사망 입증과 집계 방식, 그리고 기준이 천차만별이라 정확한 피해 수치의 통계는 알 수 없습니다.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사회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른 83만명의 근로자를 피폭자 기준으로 합니다. 83만명이 아닌 다른 기준을 쓰기도 하는데요. 연간 평균적으로 130~17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계속해서 피폭되었던, 작업 초기인 1986년에서 1987년 사이에 누출 방지와 누출 방사능 처리 작업에 투입된 해체작업자들 22만 6천 명을 기준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10만 건 이상에 달하는 낙태 수술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주변 지역의 피해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도시가 되었으며, 주변 마을들도 모조리 비워졌습니다. 이때 수많은 땅에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는데, 향후 바람을 타고 번질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아예 트랙터를 사용하여 땅을 갈아엎고 밑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흙을 퍼올려 덮어버렸죠. 주변의 숲들도 똑같은 이유로 갈아엎으려고 했으나 시간과 인력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그냥 출입금지구역으로만 지정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붉은 숲입니다.

원전에서 18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도시가 되었다가, 2003년 체르노빌 복구 및 개발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관련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습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관람도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꽤나 적은 숫자로,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빈 상태라서 유령도시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주변 국가의 피해

주변 국가들도 엄청나게 피해를 봤습니다. 일단 벨라루스(벨로루시)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죠. 특히 하필이면 바람이 북쪽으로 불고 있었던 탓에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 가량이 떨어져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33%씩이나 되는 곳(한국의 절반이 넘는 면적)이 방사능 오염으로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유럽의 반대쪽에서도 토양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의 일부 지역은 이때의 사고로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출입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탈리아산 파스타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어 일본에서 수입이 금지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 2, 30대 중에 갑상선암 발병 비율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당신의 갑상선암은 체르노빌 탓인가'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방사능량이 미미했으며, 갑상선암의 발생율 증가는 건강에 대한 관심과 검진율의 증가가 원인이라는 반론이 있습니다.

동식물들의 피해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소개령이 내려질 때, 시민들은 키우던 동물들을 데려가지 못하여 그냥 풀어주고 갔습니다. 이후 오염지역을 격리하는 과정에서 구역 내에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에게는 전부 살처분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세상 일은 끝까지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입니다. 살처분을 피한 동물들도 있었고, 현재 체르노빌 지역은 몇십 년간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 보존된 덕분에 야생동물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방사능 물질이 어느 정도 줄어들자 동물들이 돌아와, 현재는 유럽의 희귀동물들이 여기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4m가 넘는 메기나 초거대 지렁이/쥐 사진이 떠돌면서 체르노빌 괴물이라고 나오고 있지만 루머에 불과합니다. 4m가 넘는 메기는 웰스메기라는 종으로, 원어종 자체가 3m는 자라며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자연 상태로 자란 것에 불과하고 하는데요. 방사능으로 인해 오히려 크기가 줄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초거대 지렁이는 '자이언트 지렁이'라는 녀석으로, 남미/호주에 서식하는 종. 이 또한 원래 기본 1m에 최대 3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거대쥐는 중국 모 대학생의 제작품이라고 하네요.

어쨌거나 야생동물의 천국이 된 것까지는 좋은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잔류 방사능 물질 때문에 체르노빌에 들렀다 오는 철새들의 생식능력이 떨어져 간다고 합니다. 실제로 체르노빌 주변에서 서식하는 기형동물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하나의 몸통에 머리통이 여러 개가 달린 개구리나 자체가 둘둘 말린 해바라기나 꽃 한가운데를 뚫고 다시 올라온 꽃대와 꽃 같은 기형 생물들이 실제로 발견되고 있긴 합니다.

정치적 영향

미국과 소련 양국의 핵무기 감축 논의에 체르노빌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보다 더 넓은 지역이 더 높은 수치의 방사능 오염지대로 변하면서 핵전쟁 이후 펼쳐질 지옥에 대해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며 핵무기 감축을 주장하는 세력이 정치계에서 큰 힘을 차지하게 되어 핵무기 감축에 기여했다는 것이죠. 물론 핵무기 감축을 통한 비용 절감 등의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리고 덤으로 소련까지 무너졌으니 미국은 좋죠.

더불어 이 사고는 소련에 엄청난 재정지출을 강요하여, 안 그래도 석유 가격 하락으로 고생하던 소련 경제에 일격을 날렸고 소련이 붕괴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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