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사태(사건)란? 뜻/배경/영향/사망자 수/결과

천안문사태란?

천안문광장앞에서 있었던 일련의 민주화 운동들을 말합니다. 흔히 1차 천안문 사태라 불리는 1976년 천안문 사태2차 천안문 사태 혹은 천안문 항쟁으로 불리는 1989년의 천안문 6.4 항쟁이 유명하고 이중에서도 천안문 6.4 항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안문 사태는 이 2차에 속하지요. 1차 천안문 사태는 마오쩌둥 체제 말기인 1976년 4월에 일어났습니다.

1차 천안문 사태(1976)

온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던 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을 계기로 하여 중국인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반발한 봉기이죠. 위에서 말씀드린 천안문 사태(2차)와는 천안문광장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것 빼고는 관계가 별로 없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주석과의 갈등으로 실각한 온건파 전 총리의 사망을 추모하는 데서 시작되어 실제적인 거대한 시위로 일어났다는 것은 공통점이나 이후의 전개와 후일의 중국 당국에서의 평가는 달랐죠.

저우언라이 총리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중국은 이후에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추모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이에 대해 저우언라이를 적대하던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저우언라이를 비난하며 저우언라이 추모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가 하면 공권력을 동원해서 추모를 방해했고 장칭 자신은 저우언라이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매우 오만불손하게 구는 등 중국인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3월 청명절 기간부터 베이징 시민들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 영웅 기념비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화환을 걸고 저우언라이를 추모했는데 정부는 이 기념비에 바쳐진 화환을 전부 철거해버렸습니다.

덩샤오핑 부주석

그러자 분노한 인민들은 4월 5일에 봉기하여 건물을 부수고 자동차에 불을 붙이는 등의 폭력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심지어 마오쩌둥 체제를 뒤집어 엎으려는 시도도 일어났지요.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반혁명세력으로 간주하고 공안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해산시킴과 동시에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4인방은 이때다 싶어서 덩샤오핑 부주석에게 모든 책임을 물리고는 실각시켰습니다. 이후 11월 25일 중공 중앙공작회의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이 공식적으로 천안문 사건은 혁명적 대중운동이었다는 내용을 발표하며 '천안문 사건'은 '4.5 운동'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4.5 운동은 4인방에 반대하는 인민들의 혁명적 행동으로 각급 학교 역사 교과서에 서술되고 있지요.

2차 천안문사태(천안문 6.4 항쟁)(1989)

천안문 6.4 항쟁은 1989년 6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민주화운동입니다. 일반적으로 천안문사태라고 말하면 이 항쟁을 말하지요. 인민해방군과 시위대의 충돌로 최소 5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천안문사태라고 주로 부르지만 이는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쓰이는 말입니다.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홍위병들과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중에는 상인도, 노동자도, 언론인도, 의사도, 대학 교수도, 심지어는 공안에 법조인, 공무원도 있었으며 적게는 9살짜리 아이에서 많게는 백발의 노인까지 참여한 범대중적 평화 시위였습니다. 거기다 1980년대 말 세계는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동구권에 불기 시작한 자유화의 물결로 넘실대던 시기였고, 천안문 항쟁의 소식이 전세계 언론으로 보도되자 미국, 유럽은 물론 개방화가 진행되던 소련 매체에서도 이 시위를 지지하였습니다.

베이징 공안들도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였다.

따라서 학생 지도부, 베이징 시민, 그 누구도 인민해방군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진압봉과 최루탄 정도를 사용한 강제해산 정도로 끝나고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본 것이죠. 하지만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이 이끌던 중공은 인민을 진짜 총칼과 전차로 깔아 뭉개버렸습니다. 특히 인민을 해방한다는 군대가 일당독재와 부정부패로부터 해방을 부르짖던 인민을 짓밟았다는 점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어마어마한 유혈진압이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현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그리고 1980년대 말 세계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자 중국 민주주의 역사에 주요한 이정표로 남게 된 미완의 가능성으로 평가받습니다.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반체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 투쟁과 시위 와중에 락 페스티벌을 방불케 할 만큼의 자유와 창발이 구현되었다는 점, 당시 각 세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의 격화로 인해 조성된 정국 하에 촉발되었다는 점 등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영향

개혁, 개방 개시 이후 서구, 일본 등의 선진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경제성장을 꾀하던 중국 공산당에게는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몰고왔습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먼저 선린우호 전략을 내세워서 아시아의 주변 국가와 국교를 맺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1992년의 한-중 수교도 바로 이러한 중국 전략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죠. 또한, 내부적으로 중국은 국가 내 사회영역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국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체제 안정과 제도의 정비를 국내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게 됩니다.

사망자수

진압과정을 묘사한 그림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다만 뉴욕 타임스 지에서는 400명에서 800명, NSA에서는 약 1,000명, 중국적십자에서는 2,600명, 시위대의 주축을 이룬 학생들은 7,000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며, 부상자 수는 진압에 나선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약 7,000명에서 10,000명으로 추산됩니다.

결과

진압군을 설득하는 베이징 시민들

천안문 사건 일주일 뒤, 시위를 주도한 자들에게는 당초 약속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뒤집고 대거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특히 다수의 학생 시위대를 겨냥한 21명의 블랙 리스트가 언론 매체에 퍼졌는데요. 많은 지식인들이 이 시기에 잡혀들어가 중형을 언도받거나 국외로 추방되었고, 혹은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국외로 망명했습니다. 이들을 돕기 위한 망명 작전이 바로 '카나리아 작전' 이죠.

카나리아 작전은 서방 국가나 홍콩, 대만 시민들과 민주화에 찬성하는 남중국 시민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수의 해외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중국 학자들과 뜻있는 시민들이 이 시기 반체제 지식인들을 위해 비자를 발급해주고 비행기나 배 등의 수단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시위 진압 명령을 하달한 총리 리펑이 덩샤오핑을 이을 후계자로 부상하는 듯 했으나, 정작 덩샤오핑은 당시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중앙 정계로 진출시키고 실제로 후임 주석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 사태에 참여해온 정치범 가운데 마지막까지 복역해온 먀오더순 씨가 27년만에 2016년 10월 15일에 출옥한다고 보도했으며, 석방 일시를 공식 확인해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장쩌민

이후 인민해방군 안에서도 징계받은 인원이 사병 중에서만 천 명 단위로 있었다는 내부 문건이 폭로되었는데, 탄을 허공에 다 쏴버리고 빈 총 들고 다니다 걸린 인원, 총기를 일부러 고장내다 걸린 인원, 못 본 척 하거나 빠져나갈 길을 트여주다 걸린 인원, 아예 무전 꺼놓고 버티다 걸린 인원, 그냥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고 울다가 걸린 인원, 일부러 제 발에 총 쏘고 후방으로 후송되다 걸린 인원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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